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요제프 2세 (문단 편집) === 공동통치기 === [[프란츠 1세|아버지]]처럼 완전한 허수아비 신세는 아니었지만 선임 통치자인 어머니의 '''공동 통치자'''로서 2인자, 즉, [[콩라인]]이었다. 일단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으나 당시 황권은 극도로 제한되었고 실질적인 권력은 '''자신의 영지'''에서만 발휘할 수 있었다. 당시 [[합스부르크 제국|합스부르크 세습령]]의 통치권을 행사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작위는 오스트리아 대공, 보헤미아 국왕, 헝가리 국왕의 세 자리였다. 이 작위를 모두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가 차지하고 있었기에 가장 중요한 결정권도 어머니가 행사했고, 그의 위치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겸 오스트리아의 공동 통치자,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왕자라는 애매한 자리였다.[* 황제가 신성 로마 제국에서 권력을 행사하지 못한다는 말이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안될 수 있겠지만, [[30년 전쟁]]을 끝낸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여러 제후국들이 독립적인 행보를 취해온 지가 이미 백년이 넘었기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칭호는 이름만 남은 자리일 뿐이었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영토는 [[오스트리아 대공국]], [[보헤미아 왕국]], [[헝가리 왕국|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 및 [[트란실바니아 대공국|에르데이 대공국]],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밀라노 공국]]이었고 모자의 공동통치기간에 추가된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 [[부코비나 공국]]이 있었는데 이 영토들의 군주는 요제프 2세가 아니라 마리아 테레지아였다. 심지어 보헤미아 왕국과 헝가리 왕국은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만 후보로 나올 수 있게 반세습화 되었다 하더라도 공식적으로는 [[왕세자]]가 없는 선거군주제였기 때문에 보헤미아와 헝가리에서는 왕세자도 아니었다. 조악하게나마 [[한국사]]에 비유하자면 마리아 테레지아가 [[상왕]]이고 요제프는 상왕이 죽어야 그 자리를 이어받을 수 있는 허수아비 왕에 불과했다.]. ~~남편도 허수아비, 아들도 허수아비.~~ 그의 재위 기간 25년 중 15년이 [[마리아 테레지아]]의 생애와 겹치고, 그 기간 동안 그는 어머니의 그늘에 가려 통치자다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 했다. 그래도 나름 반항하여 어머니와 자주 충돌했고 폐위시키겠다는 협박도 쳐봤으나 오히려 어머니에게 [[명종(조선)|"폐위당할래?"]]라는 협박을 받기도… ~~대체 누가 황제야~~ 모자간의 대립은 정치관과 사상의 차이에서 왔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영토 확장보다는 제국의 안정을 중시했고 아들의 젊은 혈기와 성급한 성격에 대해 항상 우려했다. 반면에 요제프 2세는 여느 다른 유럽 젊은이들처럼 [[프리드리히 대왕]]의 빠로, [[프로이센 왕국]]을 본받아 전제적 계몽주의를 수용해 왕권을 강화하고 적극적인 팽창 정책을 펴고자 하였다. 종교관과 사상에 있어서도 어머니는 경건하며 합스부르크 왕가의 역사적인 [[가톨릭]] 신앙의 정치적 수호자로서 역할에 열의를 보였던 전형적인 17세기의 합스부르크 가톨릭 군주였으며, [[폴란드 분할]]에서 보여주듯 이런 교파주의적 도덕관과 대외관에 민감한 모습을 보였던 반면 아들은 계몽주의의 세속주의적 이성주의를 추구하며 이에 따라 국익이나 팽창을 위해서는 종교적, 역사적 우방이고 나발이고 없는 근대주의적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모자간에 불화가 있었다고는 해도 이 동안 요제프 2세는 주로 제국 의회[* 신성 로마 제국이 아니라 합스부르크 제국이다. 특히 합스부르크 제국의 정치적 중심지였던 오스트리아 대공국에서는 신성 로마 제국의 용어를 거리낌 없이 차용했다.]에서 마리아 테레지아가 발표할 [[연설]]문을 작성하곤 했다. 이 연설문에도 자기 자신의 정치사상이 그대로 들어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